파리, 텍사스

우리는 흔히 주위 사람들에게 설명하려고 애쓴다. 새로운 직장에 대해, 어제 본 드라마에 대해, 일상적인 교통 체증, 병원, 최근까지 만났던 연인에 대해, 내게 일어난 일들과 나의 감정들을 말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주 많은 노력과 스스로와의 대화, 그리고 대화 상대와의 피드백을 거치지 않으면 내가 설명하려는 것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수많은 노이즈, 일상적 언어라는 매체의 빈약한 해상도, 그런 걸 떠나서라도 애초에 전달할 수 없는, 설명될 수 없는 감정과 시간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한 개인의 역사와 복잡함에서 기인하는 희열, 고통, 애증, 모순, 후회와 자책, 이런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순서와 관계가 복잡한 일들 말이다. 이런 몇몇 단어로 일반화하면 누구든 자신의 경험을 떠올릴 수 있지만, 누구도 결코 타인의 경험을 직접 겪어볼 수는 없는 것이다. 발신된 편지는 잘못된 주소이든 반송이든 누군가에게 도달한다지만, 애초에 발송할 수 없는 편지는 어떻게 될까. 영원히 편지를 쓴 사람의 손에 남아있고, 편지를 쓴 사람이 연단에 올라 큰 소리로 읽으면 지나가던 이들은 편지의 일부분, 몇 글자를 듣고 대략 그런 사연이겠거니 넘겨짚고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발송도 하지 않은 편지를 왜 썼고 왜 읽어야하는가.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일들이 편지를 쓴 사람에게 일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파리, 텍사스는 처음부터 그런 느낌을 주는 영화였다. 3시간 짜리 영화에 '처음부터'라고 하면 30분정도를 잡으면 될까 싶지만 대충 그정도까지다. 주인공 트레비스가 어색하게나마 자기 표현을 하기 전까지 그에게 뭔가 말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일이 일어났으리라고 예감했다. 그가 백인 중년 남성 미국인이라 사실 대단히 인간성이 훼손될 만한 일을 당했다고 상상하지는 않았다. 처음부터라고 말을 뗐으니 말인데 종말에 그는 가정폭력범이었던 걸로 드러났다. 한 발자국 떨어져 생각해보면, 죽은 줄 알았던 가정폭력범 남편이 살아돌아온다는건 심각한 스릴러물의 시놉시스가 될 만 한 이야기다. 관객들은 이 남자의 비밀이 무엇인지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마지막 통화 시퀀스까지 알 수 없다. 영화가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트레비스가 숨기는 사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으면서 그의 고독, 그리움, 걸음걸이, 무작정 황야를 걷는 기이한 작은 반점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마치 말 없는 이웃을 관객에게 소개시켜주며 그의 친절함을 알려주려는 것 같다. 그 이웃은 나침반도, 물도, 석유도 없이 홀로 황무지를 걷는 것처럼 고독하지만 아들을 사랑하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당신이 잠든 사이에 당신 가족의 모든 신발을 닦아 널어주고 설거지를 할 거라고 말이다.
오랫동안 대화하지 않으면 말 하는 법을 잊어버리게 된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종종 대화의 빈도와 질에 따라 말하기가 퇴화된다는고 느낀다. 말하고 싶은것, 말해야하는 것, 느끼는 것, 요청해야하는 것을 입 밖으로 일상적인 구조로 꺼내기, 또는 그 것을 입 밖에 내고 싶다고 느끼기까지 모두 말이다. 처음 모하피 사막에서 발견된 트레버스는 대답하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 같았다. 동생이 제발 대답해달라고 사흘을 빌었더니 그가 처음 한 말은 '파리스'. 그는 자신을 찾아 모하비 한가운데로 온 동생을 두고 다시 '파리스'로 홀로 향한다. 하지만 동생이 삼고초려한 끝에 그는 동생을 따라가기로 한다. 그리고 동생에게 '파리스'에 대해 들려준다. 텍사스 주의 파리스라는 곳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만난 곳이라서 땅을 우편으로 샀다고 말이다. 목적지와 그곳으로 가려는 이유를 말하고 나서야 트레비스는 동생과 동행하고 아들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 
트레비스가 동생을 따라 엘에이에 도착하고 난 뒤로 부터는 그냥... 별 감상이 없다. 감상이 없진 않다. 없었으면 이 글을 쓰지 않았겠지. 영화 내용 보다는 영화의 관점이나 상투적인 미국영화와는 다른 전개가 영화를 보는 동안, 그리고 보고 난 후에도 뭔가를 . 트레비스는 엘에이에 도착했을때 그냥 동생의 아픈손가락이면서도 동시에 평범한 미국 남자 같다. 막 걷기 시작했을때부터 5년이나 떨어져있었던 아들들과 친해지고 싶고, 아내와는 뭔가 사건이 있어 이혼을 한 것 같은데 아내를 여전히 사랑하고... 그래서 아내를 찾으러 간다... 근데 아들이 따라가려고 해서 같이 간다... 그에게는 부모 이상으로 그를 사랑하고 헌신하는 삼촌 내외가 있음에도... 그렇다고 로드무비가 감동적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긴박하고 절박한 카체이싱 이후 마침내 찾아낸 아내는 손님과 유리 너머 전화기로 대화해서 돈을 받는 일종의 성매매 업장에서 일하고 있다. 여자들은 유리 건너편에서 손님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고 연기하는 직종의 스테레오타입과 성적 판타지를 만족시켜주고 순응적인 반응을 보이면 된다(는걸로 보였다). 트레비스는 아들에게 아내가 뭘 하는지 말할 수 없었다. 아내에게 아들을 보여주는 대신 트레비스는 아들과 함께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신다.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보이는 어린아이는 술에 취한 아버지를 부축해 창고 같은 곳에서 밤을 보낸다. 솔직히 이 시퀀스에서는 화가 났다. 어린이를 술집에 데려가는걸로 모자라 모텔도 아닌 이상한 곳에서 어른은 인사불성인 채로 아들을 놔둔 채 자기는 취해서 쳐 자고 술주정이나 하다니 너무 무책임한 행동이다! 하지만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이상적인 모습 대신 무책임하고 나약한 한낱 술주정뱅이가 감독이 의도한 연출이려니 한다. 그는 몽롱한 말투로 취한 아버지가 들려주는 재미(없)있는 옛날 얘기를 하듯 아들에게 할아버지에 대해 들려준다. '(할)아버지는 (할)어머니가 텍사스 파리스에서 자랐는데도 마치 프랑스 파리 여자인 것처럼 농담을 하더니, 어느순간부터 그걸 진짜라고 믿어버렸다.' 이게 무슨 뜻일까?
아버지는 의처증이 있었다. 그리고 트레비스도 의처증이 있었다. 그러나 트레비스는 아버지와 달리 아내를 향한 폭력-자신의 행동에 떳떳하지 못하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다. 이 폭력은 그의 깊은 고독의 원인이라는걸 마지막에야 짐작할 수 있다.
가장 사랑한 사람에게 가장 잔인하고 집요하게 폭력을 휘두른 사실을 누구한테 털어놓을 수 있을까? 그리고 아내가 자신을 죽이려고 하면서까지 도망치려 했다는것을 마침내 깨달았을 때 그는 이전처럼 삶을 살 수 있었을까? 트레비스는 왜 아무도 자신을 모르고 말할 필요도 없는 곳으로 떠나야했는지를 자신을 찾아온 동생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내 제인은 어린 아들을 남편의 동생에게 맡기고 돈을 벌기 위해 핍쇼 부스에서 일하고 있었다(제인이하는 일을 한국어로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몰라서 처음으로 영화를 구글링하였음. 핍쇼(peep show)는 개인용 부스를 이용하는 스트립쇼인 것 같다).  
나는 대충 이런 맥락으로 이해했는데 감독이 의도한것도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 예전같으면 영어권 기사라도 찾아서 읽었을텐데 그냥 내가 느낀대로 남기고 싶다. 일단 영화 내용만 봐서는 더 내가 이해해야할 비유나 이야기는 없는 것 같다. 아무래도 황무지 60% 그리움 20% 이상한 애증 10% 기타 10% 합친 것 같은 영화이니.
모든 씬이 다 아름답고 사진 작품 같았다. 특히 아들과 함께 집으로 향하는 모습을 뒤에서 찍은 장면이 기억난다. 산 중턱의 집으로 가는 포장도로를 걸어올라가는데 산을 비스듬히 도는 도로를 따라 커브를 도는 트레비스와 아들, 오르막을 아래에서 찍어서 아버지와 아들이 코너를 돌아 화면 위로 올라가는 뒷모습을 찍은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별 것 없는 주택가를 배경으로 저렇게 예쁜 화면이 나올 수 가 있다니.
대사가 극단적으로 없고 모든걸 이미지로 보여주려고 한다는 점에서 유럽영화 같았다. 내가 알던 영화들과는 다른 매력이 있긴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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